지금 현대 과학에서 가장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첨단과학 분야는 바로 생명과학(生命科學)이다. 과학자들은 오늘도 실험실 안에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과연 인간 생명의 근본물질(根本物質)은 무엇인가? 인간의 몸 속에는 신비한 그 무엇이 존재하기에 이렇게 사람은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가? 인체의 세포(細胞)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죽고 새로운 세포를 탄생시켜 계속 새로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 각각의 세포가 계속해서 새롭게 탄생되고 있듯이 신체의 모든 기관도 새롭게 탄생될 수는 없는 것인가? 현대의 첨단 과학에서도 이러한 의문에 시원한 대답을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어렵고 먼데서만 찾아 보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주변에서, 우선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에서부터, 차근차근 새로운 시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생각하는 대로 피가 변하다. 피가 변하면서 몸이 변한다.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요,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대로 지금 여러분의 피는 변하고 있다. 근심걱정을 해도 피가 변한다. 근심걱정이 많은 사람은 얼굴에 기미가 끼게 되는데, 이것은 마음 상태에 따라서 피가 변질되며 변질된 피가 얼굴에 있는 모세혈관에 축적된 현상이다.

피가 변질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산화(酸化)되었 다는 것을 말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피가 산성으로 변한다. 그것은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는 순간, 피가 산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알 수가 있듯이, 화가 났을 때 혼탁한 피가 머리를 한 바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피가 혼탁할수록 혈관에 저항을 주며, 혈압도 상승한다. 피가 변질된다는 것은 피가 썩는 것이며, 피가 썩는다는 것은 곧 피가 죽는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기를 근심걱정에 쌓여 있는 것을 가리키며 ‘속을 썩인다’ ‘애를 태운다’라고 하는데 이는 대단히 과학적인 말이다. 썩는 것과 태우는 것이 모두 산화작용(酸化作用)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나라는 의식’이 욕심을 부리면 피가 썩는다. 욕심부리면 피가 썩는다. 근심 걱정을 해야만 피가 썩는 것이 아니다. 욕심을 부려도 피가 썩는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고 음식을 먹으면 체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욕심 부리는 마음을 품는 순간 피가 썩는다. 썩은 피는 모세혈관을 가로막으며, 위장을 비롯한 모든 소화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먹은 음식은 그대로 위에 걸려 버린다. 이때 위경련이나 위통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체하는 현상이다.

성경이 영육일체를 증거하는 구절의 말씀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요, 말씀은 생명이요,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 ∼4). 고기를 생명이되는 피째 먹지 말라(창9: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17:11). 생명의 근원은 마음에 있음이라 (잠4:2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누가복음 20:38).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태복음 22:32). 또한 성경에 영과 혼 같은 개념들이 있지만 이것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인적인 개념에서 보야 한다는 것이 최근 성서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점은 구약성서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에서는 영육의 분리가 아니라 영육합일체로서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에도, 몸과 마음 사이에는 긴밀한 상호 관련성이 있다. 마음작용은 혈액작용에 의해서 생화학작용으로 생명의 혈액이 변화하면서 우리의 육체의 변화가 일어나다는 사실다. 나라는 의식(원죄) 행동과 생각에 의해서 세포조직의 손상과 같은 몸 속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변화는 마음작용은 혈액작용의 요소인 화학작용으로 바꿀 수 있으며, 따라서 정서상태나 사고작용 그리고 다른 심리학적 변인들을 수정할 수 있다. 이처럼 마음과 몸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병에 걸린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나 신체기관의 어느 한 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전인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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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주의 이슬
대선지자 이사야는 동방의 땅 끝 땅 모퉁이(41장9절) 즉 한반도의 모퉁이 땅 김포에서 구세주가 출현하실 것과 그가 구세주의 증표로써 이슬성신을 제시하실 것(26장19절)과 구원사역의 과정에서 겪게 될 온갖 고초와 재판과정(41장1절)과 마지막 승리(41장11절)에 이르기까지 말세에 있을 일들을 이사야서의 전편을 통해 너무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26장:19절)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깨어 노래하라’ 하였으니 성경 전체를 상고하여도 위의 말씀같이 통쾌하고 영광된 말씀이 없다. 사망의 멍에를 벗어날 수 없는, 미물과도 같은 티끌에 거하는 죄인들이 사망과 음부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주의 빛난 이슬이 임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슬은 구세주의 증표로써 성경뿐만 아니라 제경전이 공통적으로 기록한 바다. 성경은 이슬 또는 이슬성신, 피와 불과 연기기둥 등으로 썼고 민족경전에는 감로해인으로 썼고 불경은 감로라고 썼으니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것이다. (성경의 구세주와 불경의 미륵불과 민족경전의 정도령은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한 분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업장)를 해결해주는 이슬을 베푸는 이긴자가 구원의 역사를 하고 있을 때 원수 마귀의 세력이 최후 발악하며 수많은 가짜증인을 모아 소송을 일으키며 방해할 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41장 21절)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41장9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43장 5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장10절)


위의 대목들에서는 구원사역을 파괴하려고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의인을 치는 장면이 연상됨과 함께 당신의 사람을 위하여 변론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아도 위의 대목들같이 의인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절절이 묘사된 곳이 없다. 지리한 암흑의 시간이 끝난 후 진리가 승리할 날이 이를 것 또한 예언 되었으니 아무리 원수마귀의 권세가 대단하여도 이긴자의 출현 앞에서는 거름물 속의 초개(草芥)의 밟힘과 같이 밟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다.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41장11절~14절)

수많은 선지자들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구원을 이루려고 산기(産期)가 임박하여 고통스럽게 부르짖는 여인같이 몸부림쳤으나 그들이 이룩한 것은 바람과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한국 땅 경기도 소사의 승리제단에서 구세주가 출현하셔서 빛난 주의 이슬로써 만민을 구원하시니 이사야의 예언은 이때에 정녕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이사야서에는 전편을 통해 구원을 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3년 동안 벗은 몸과 발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고 진실되게 전하였다. 그의 예언을 분석하고 이해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6장 8절의 하나님을 향한 충절이다.

중동 지방을 정복한 앗시리아 강대국이 남방으로 진군하여 BC 722년 북이스라엘 왕국을 점령하고 남쪽 유다 왕국을 점령하려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강요할 때 유다왕 히스기아는 신심이 깊은 이사야 선지자의 지도와 후원으로 힘을 얻어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성경 본문에는 천사가 나타나 앗시리아 군대를 하룻밤 사이에 시체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지만 실상 장기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중에 발생한 전염병이 맹위를 떨치니 대다수 군사가 사망하여 전의를 잃고 본국으로 퇴각한 것으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이사야는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선지자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희구하는 절세의 신앙인이 되고 정치적 견지에서 보면 국가의 장래를 경영한 경세가(經世家)로 유대 왕국이 세계를 지도하는 시온(예루살렘)의 영광을 기대한 사람이다.(사 2장, 9장, 11장을 중심으로) 성경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사야는 당시 왕들의 전기(傳記)도 썼다고 외경은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절대적인 활동으로 히스기아 왕에게 신념과 용기를 주었으니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하나님같이 의지하였다. 당시 앗시리아군에게 굴복하였다면 이스라엘 왕국과 함께 유다 왕국도 망하였을 것이다. 왕국은 1백20년간 더 유지되다가 신흥국인 바벨론에게 정복된다.

히스기아 왕은 이사야의 지도를 따라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하였으나 왕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오른 후 부왕이 제거한 이방신상을 재건하고 우상을 광신하면서 여호와를 배반하니 왕에게 충고하는 충신을 모두 죽였다. 이사야 선지자도 90세 가까운 고령에 목숨을 걸고 왕을 책망하다가 나무 관에 넣어 톱으로 켜서 무참하게 죽였다고 외경은 전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실로 방대하여 신구약 성경의 모든 선지자의 예언을 종합하여도 이사야 한 사람의 예언을 따르지 못할 정도다. 그는 서슴없는 자세로 패역을 고발하고 멸망을 경고하였는데 한편으로는 장차 도래할 구세주의 세상에 대한 희망을 획기적인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서는 여느 성경에 비해 훨씬 문체와 문장이 정교하고 고상하여 만인이 탐독할 만하다. 성경 66권이 기록된 목적과 그 골자가 이사야서에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지 모르나 이사야서 전체가 66장으로 되어 있음을 볼 때 수리영동(數理靈動)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민족의 구세주 정도령의 출현과 그의 구원사역을 기록한 세계적 신서 격암유록에는 賽三五(새삼오), 賽四一(새사일), 賽四三(새사삼), 賽四四(새사사), 賽六五(새육오)라는 이름으로 이사야서가 5장이나 수록되어 있다. 이로써 민족의 구세주 정도령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인류의 구세주와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사야의 예언 내용은 구세주를 배출하는 우리민족의 자긍심으로만 정확히 해석할 수 있으니 유다 왕국의 미래상, 세계의 미래상, 한반도의 미래상 으로 구별하여 해석된다. 우선 이사야 선지자는 ‘여자의 아들’을 예언하고 있는데 그는 모태로부터의 의인이 아니다.<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이르러 버터와 꿀을 먹으리라.(사 7:14-15)> 위의 예언을 육적으로 해석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선 처녀는 잉태를 할 수도 없고 아들을 낳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이르러 버터와 꿀을 먹으리라.(사 7:14-15)’위의 예언을 육적으로 해석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선 처녀는 잉태를 할 수도 없고 아들을 낳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본문의 처녀는 영적(靈的) 처녀 즉 영이 순결한 하늘의 사람, 아브라함에서 이삭, 야곱으로 이어진 하나님신의 상속자를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처녀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주장하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설령 마리아가 육적 처녀인 동시에 영적 처녀라 할지라도 그의 아들 예수가 임마누엘 즉 구세주가 될 수 없음은 사도 요한이 남긴 글에서 분명하다. 사도 요한은 예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장차 여인의 후손이 올 것을 계시록 12장에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여자가 육신이 아닌 신령한 사람으로 해와 달과 12별을 몸에 입고 있으니 신의 사람이라는 것과, 그가 낳은 아들은 만국을 다스리는 이긴자로서 하나님 보좌에 오르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붉은 용의 원수 마귀를 멸하고 승리한 자니, 요한이 기록한 제 조건은 예수에게는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것들이다. 위의 본문에서,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씀의 뜻은 아이가 모태의 의인이 아니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으로 잉태한 예수는 죄인이 될 수가 없고 있지도 않는 악을 벗을 수가 없다.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써 하나님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임재하신 구세주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아들은 모친(영적 처녀)의 도움과 스스로의 불같은 연단을 받으면서 죄를 벗고 의인이 되니 이러한 과정을 본문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였다, 버터와 꿀을 먹는다’라고 기록하였다.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함은 스스로 도통함을 뜻하며 버터와 꿀을 먹는다는 것은 육적인 음식을 말하지 않고 영생의 양식, 생명과일, 신령한 양식을 지상의 최고 음식물인 젖과 꿀로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신령한 만나를 먹는 자가 임마누엘이니 죽을 수 없는 영생자가 되는 것이다. 후대의 선지자 미가 또한 5장에서 이사야 선지자와 유사한 예언을 하고 있다. 만국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과 그의 근본이 상고 즉 태초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5:2).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친다(5:4)’ 하였으니 이사야의 예언 ‘동방의 땅끝 땅모퉁이’ 즉 한반도에서 메시아가 오실 것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여호와에게서 내리는 이슬(구세주의 증표인 이슬성신) 또한 예언하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역대 선지자들이 종교적 측면에서만 활동하고 글을 쓴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상 선지자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로 정치적으로 왕을 보필하고 교도하면서 국가를 보존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북방 강대국 앗시리아가 북국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남국 유다 왕국을 침공하려는 위급한 시점에서 이사야는 유다 예루살렘을 구원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끝날에 예루살렘에서 세계를 지도하는 메시아가 나온다고 신의 계시를 받고 말한 이사야는 동방 한국에서 만국을 다스리는 의인이 나오고 사막으로 상징한 소사(素砂)에서 구원의 길이 예비되는 깊은 뜻을 자신이 알지 못하였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메시아가 출현할 때는 죽지 않고 영존하는 평강의 왕으로, 영원토록 왕중 왕(King of Kings)으로 임하여 그 나라가 무궁하다고 수차 기록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은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한다고 말하므로 메시아가 아니라고 단정했던 때문이었다.(단12: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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