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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는 둥지에서 자지 않는다

학교 뒷문 옆에 백로가 서식하는 숲이 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백로가 해가 기울 무렵이면 
모여들어 나무 가지마다 커다란 흰색 꽃을 피우듯
하얀 숲이 참 아름답다.

비바람이 몰아 칠 때면
바람에 출렁대는 나뭇가지 위에서
다리로 버텨가며 흔들리는
나무에서 잠자는 백로를 보면 안스럽다.

그런데 새는 둥지에서 자지 않는다.

둥지는 알을 낳고 키울 때만 사용한다.
새가 커서 한번 둥지를 떠난 후에는
다시는 둥지에 돌아오지 않는다.

새는 둥지가 아니라 홰에서 잠을 자기 때문이다.
새가 둥지에서 자지 않는 이유는 날기 위해서이다.

새의 날개의 깃털을 깨끗하게 유지해 날기 위해서다.
폐쇄적인 둥지에서 쉬거나 잠을 자면
둥지 안에 있는 오물이 깃털을 더럽힐 수 있다.

오물로 날개가 더러워지면 균형을 잃어서
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새는 둥지에서 자지 않는다. 

그래서 새는 개방된 공간인 홰에서 잠을 잔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둥지 안의 어린 새가 똥을 누면
어미 새가 어린 새의 똥을 입으로 
물어 내다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둥지를 노리는 침입자가
그 똥 냄새를 따라 둥지로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데
한편으로는 어린 새의 날개를 깨끗하게 유지시켜
둥지를 떠나 날아야 할 때를
대비시키기 위한 뜻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면
둥지를 틀었다 하는데
새에게 둥지는 크면 떠나야 할 자리일 뿐이다.

우리 삶도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니라
홰를 쳐야 하는 것 아닐까?

폐쇄 공간인 둥지에서 날개를 접고 쉴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날아 오를 수 있는 열린 무대인 홰에서
날개를 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편한 자리와 편한 시간들은
날아 오르지 못하게 하는 둥지이다.

편하지 않은 자리와 편하지 않은 시간들은
날아 오르기 위한 홰이다.

미국문화원에서 클럽활동을 하던 학생시절에
당시 문화원장이 젊은 학생들에게 선배로서 
해주고 싶다고 한 말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는 커피도 마시지 않는 열심한 몰몬교 신자였다.  

한 과학도가 새 100마리를 갖고 실험을 했다.
방에 넣어두고 '날아라'하고 외치면
외칠 때마다 새들이 날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새들의 날개를 떼고 '날아라' 하고 외쳤다.
100번을 외쳐도 새들은 날지 않았다.
다음은 그의 연구실험 결론이다.

'새는 날개를 떼면 귀가 먼다.'

나도 과학을 하는 사람이지만 
연구에서 실험과 통계는 아주 중요한 탐구 도구이다.
그런데 그 결론은 과학적일 수도 
또는 위 과학도처럼 전혀 비과학적일 수도 있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도 
전혀 다르게 결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국가 경제의 통계지표는 다 좋다고 하는데
국민들의 살림살이와는 전혀 다른 경우도 
날개가 없으면 날지 못하는데 
듣지 못해 날지 못한다고 하는 통계와 같다.

살림살이 돈이 없어 살기 어려운데 
돈을 쓰지 않아 어려워진다고 하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가족간의 사랑이 넘칠 때도 있고 모자를 때도 있는데
넘칠 때는 내가 많이 사랑할 때고 
모자를 때는 내 사랑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새가 듣지 못해서 날지 못한다고 하는 경우이다.

오늘 이 새 실험을 되새기게 된 것은
툭하면 나오는 정치 지지도 통계 때문이다.

통계 숫자로 정치의 잘잘못과 
경제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데
숫자가 오르면 잘하고 있다고 하고
숫자가 내려가면 바꿔야 한다고 하는 말들이
꼭 위의 새 실험을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교양과목으로 들은 정치학 첫 시간에
정치는 사회에 대한 가장 큰 서비스다 
라고 한 교수의 말이 새삼스럽다.

정치는 국민과 사회를 
자기 취향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사회가 잘 가도록 봉사하는 것이 아닌가

숫자로 판단하는 정치가 슬프게 한다.
어찌 정치뿐이랴.
종교도 요즘은 숫자로 판단하고
사랑도 가진 패의 숫자로 재기도 한다. 

숫자가 주인이 된 오늘이 그래서 슬프다.

어렵다고 둥지로 들어가지 마라
둥지를 떠나지 못하는 새는 죽는다

힘들다고 날개를 접지 마라.
새는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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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칙과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삶을 보면
모두 자신이 세운 원칙을
하늘에서 계명을 받은 모세처럼
자신의 삶을 자신의 원칙으로 무장하려 한다.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듯이
자신의 원칙을 하늘의 원칙처럼 세우면서
그 원칙에 맞지 않으면 적 으로
또는 세상에 맞지 않는 모자라는 이로 몰아 버린다.

원칙의 칼날이 날카로운데
오래 전에 써둔 메모를 들쳐 본다.

나의 원칙이 상대를 베는 칼이 되어서는 안된다.
원칙은 상대와 공유하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내가 세운 원칙을 상대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원칙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 오가는 다리의 기초를 놓아야 한다.

공유할 수 없는 가치를 원칙으로 세우면
칼의 날을 세우는 것과 같다.

나의 원칙은 상대를 베는 칼날이 아니라
내 오만의 날카로움을 보호하는 칼집이 되어야 한다.

자신만의 원칙으로 서로 상하게 할까 봐
창조주는 세상의 피조물에게 
원칙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사랑의 보호막이 씌워진 계명을 주었다.

내가 비워내야 할 것은
나에게 필요한 것.

나를 채워야 할 것은
남에게 필요해 내가 내주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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