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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구역 보성리 벽화고분
지하에 돌로 무덤칸을 만들고 흙을 씌운 외칸으로 된 돌칸흙무덤. 북쪽 벽에는 무덤의 주인공과 그의 아내의 것으로 보이는 수레가, 그 아래위로는 창을 든 군사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동쪽 벽에는 3열로 구성된 개마무사 대열이 형상되어 있으며 서쪽 벽에는 북쪽을 향하여 달리는 말과 건물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무덤의 구조 형식과 벽화의 내용, 그곳에서 나온 유물 등으로 보아 이 무덤이 3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http://kallery.net/s.php?i=600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사의 많은 부분을 다시 써야 한다.
왜냐하면 3세기 전반기에 이 지역은 낙랑이었기 때문이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903
그리고 이 벽화고분의 양식은 고려 벽화고분의 원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돌로 만든 무덤칸, 묘주 부부의 행렬도, 개마무사, ...
이로써 고려는 낙랑과 발해를 잇는 요동사의 한 부분임이 더욱 분명해 졌다.
그리고 개마무사는 보다 이른 시기부터 보편화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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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계승론을 부정하는 학자들

2004-01-26 김한규
‘고구려는 한국의 일부도 중국의 일부도 아니었다. 고구려는 요동(遼東)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건립된 국가로 역사에 출현했다.’

2004-09-02 임지현
"사실 고구려사를 놓고 한국사냐 중국사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이건 2천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중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요. 있었던 것은 그저 고구려일 따름입니다."

2005-03-15 이전
‘고조선과 고구려, 과연 우리 한민족의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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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고려(樂浪高麗)
한국의 학자들은 이야기하기를 꺼려하지만 고려의 문화는 낙랑을 흡수한 이후 크게 변했다.
결혼, 장례 그리고 제사의 풍습도 변했고 국호도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뀌었다.
중국에서 유행하던 고분벽화가 들어온 것도 이즈음부터다.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것은 이 변화를 더욱 촉진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평양 천도 이후의 고려를 낙랑고려라 부르는 게 어떨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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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숭배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고려가 기자를 숭배하였다는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나온다.

0945 구당서(舊唐書)
(고려의) 풍속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아 영성신, 일신, 가한신 그리고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

1060 신당서(新唐書)
(고려의) 풍속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많아 영성 및 해, 기자(箕子) 그리고 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혼인할 적에는 폐백을 쓰지 않으며, 받는 자가 있으면 수치로 여긴다.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는 사건은 BC 1046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자를 숭배했다는 고려의 풍속은 구당서와 신당서 이전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풍속이 고려 후기에 생겨난 것은 아닐까?
풍속은 변하는 것이고 고려의 혼인 풍속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0289 삼국지(三國志)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뒷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절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세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작은 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0636 수서(隋書)
시집 장가드는 데도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혼례를 치른다. 남자의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다. 만약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수치로 여긴다.

고려는 부여 계통을 표방하였고 건국 설화도 부여의 동명 설화를 모방한 주몽 설화다.
주몽 설화는 중원의 기자가 조선으로 와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는 기자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국조가 두 사람 존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을 거쳐 낙랑이 되었다.
그 낙랑을 고려가 313년에 병합하고 427년부터 도읍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부터 낙랑의 기자 숭배가 고려의 풍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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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사(김한규 2009) 보완
수(隋), 당(唐) 시대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요동’이라 불렀고 고구려 침공을 가리켜 ‘정요(征遼)’라 했다. 당시의 고구려인들도 ‘요동인’이라 자칭했다.

-- 중국이 고려를 요동으로 인식한 것은 수(隋), 당(唐)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측컨대 고려가 요동 반도를 차지한 이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http://kallery.net/s.php?i=363

고구려의 주축이 된 인적 집단은 맥인(貊人)이었다. 여기에 예계(濊系)와 말갈 등이 포섭됐고, 평양 천도 이후 한계(韓系)가 포함됐다.

-- 고려는 낙랑과 대방을 병합한 이후 낙랑조선인을 아울렀고 한성을 함락한 이후 한강 유역의 한국인도 아울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구려는 중국에서 성립된 한(漢) 조위(曹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북제(北齊) 수 당 등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삼한연맹체나 백제 신라 등 한국 국가들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던 적도 없다. 역사의식 공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 역사기록이 시작된 이래 고려는 한(韓)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적이 없었고 또 서로 동족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http://kallery.net/s.php?i=363

고구려인은 한국인과 천도 이전까지는 동류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 '한(韓)'이라는 말은 원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그리고 변한(弁韓)이 있었고 이 셋을 통틀어 삼한(三韓)이라 불렀다. 삼국지(289)나 후한서(445)에는 고려와 한(韓)이 별도로 기술되어 있어 고려는 분명히 이 첫 번째 의미의 삼한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후 삼한은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를 아우르는 의미로 쓰였다가 임나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점차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고려는 요동이면서 또한 삼한의 한 부분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백제나 신라와 동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흔적은 없다.
http://kallery.net/s.php?i=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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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5주갑 인상이 왜 중요한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이 불신되는 상황에서 삼국지와 진서에 나타나 있는 삼한의 상황에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갖다 붙이면 어색한 부분이 매우 많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중 일부를 5주갑 인상하면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
왜의 한국 침공 직전의 상황은 아래 지도와 같다.
스에마쓰의 주장대로 탄현에서 상주까지 임나의 영역이었다면 신라로부터 빼앗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나와야 한다.
또 470년에 신라는 탄현에서 가까운 곳에 삼년산성을 쌓았는데 신라가 이곳을 되찾는 이야기도 기록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기록은 없다.
554년에 관산성 전투가 벌어진 곳도 탄현 근처이고 660년에 백제가 망할 때도 이곳은 신라의 침공을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로 거론되었다.
요컨대, 4세기 중엽 이후 탄현 동쪽은 신라가 계속 점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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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옛날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잉태를 하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자 바다에 배를 띄워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시조 왕이 되었다. 황실의 딸은 지상의 신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있는데, 이것이 그녀의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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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 니브흐 족의 나무 조각품.
https://goo.gl/XVooex
그들이 곰과 호랑이에 얽힌 설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도 이 조각들이 곰과 호랑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곰과 호랑이 이야기는 에벵키, 우게데 등의 여러 퉁구스 민족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단군 설화가 퉁구스 이야기를 들여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도 국정교과서는 '발가락이 닮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https://goo.gl/1iw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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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 연구 - 신용하
5만년 전에 찾아온 빙하기로 북위 40도 이북은 인류가 살 수 없는 동토가 됐고 많은 구석기 인류는 추위를 피해 동굴이 많은 한반도로 내려왔다.
인구가 밀집하면서 식량난에 시달리던 한반도의 인류는 1만2천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이주를 시작했다. 요하 서쪽 지방에 정착한 민족을 맥족, 요하 동쪽부터 연해주에 터를 잡은 민족을 예족, 한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한족이 됐다.
그러다 5천년 전 한족, 맥족, 예족이 결합해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국민족이 탄생하였다.

-- 이분은 아직 인류유전학의 연구 결과를 모르고 계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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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설화는 허황후 설화와 다른가?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는 이광수 교수가 쓴 책인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고 한다.

허왕후가 왔다는 아유타는 오늘날 인도 북부의 아요디야다. 아유타는 힌두의 라마야나 신화에 나오는 코살라국의 수도다. 불교를 대표하는 도시가 아니며 인도를 대표하는 도시도 아니다. 아유타라는 단어가 한반도에 알려진 것은 8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때가 되어야 이 단어가 한역된 불경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유타라는 말은 나말여초기 누군가에 의해 수로왕과 허왕후 이야기에 삽입된 단어일 뿐이다.
http://premium.mk.co.kr/view.php?no=17663

이 글을 읽고 단군설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허황후 설화를 기록한 삼국유사에는 단군설화도 게재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불경에 나오는 제석환인이라는 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단군설화는 인도의 불교, 중국의 도교와 역사기록, 퉁구스의 설화 등이 섞여 만들어졌다.
이 단군설화는 국사교과서에도 실릴만큼 정치적으로 크게 이용되고 있는데, 그 정도에 있어서 허황후 설화는 비교도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허황후 설화가 국가주의에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자면서 단군설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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