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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널무덤, 전방후원분 그리고 왜계 무덤
아래의 첫 번째 지도는 고인돌의 분포도다. 이것을 보고 일본 구주에서 한국으로 고인돌 문화가 건너왔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방후원분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지도에서 보듯이 전방후원분은 일본 전역에 엄청나게 많이 분포한다.
따라서 영산강 유역에 있는 14기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 분명하다.
축조시기를 봐도 이는 확실하다.
네 번째 도표에서 보듯이 일본에서는 수백년에 걸쳐 전방후원분이 축조되었다.
반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500년을 전후한 100여년의 짧은 기간에만 축조되었다.
독널무덤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독널무덤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전국에서 고르게 발견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대형 독널이 만들어졌고 일본에서는 두 번째 지도에서 보듯이 구주에서 독널무덤이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고인돌이 출토되었던 바로 그 지역이다.
따라서 영산강 유역과 구주 지역은 문화적으로 밀접하게 연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널무덤과 전방후원분 외에도 일본 고유의 무덤 양식으로 간주되는 무덤이 금강 유역과 낙동강 서쪽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역사기록을 통해 추정한 임나의 영역과 일치한다.
http://qindex.info/drctry.php?ctgry=1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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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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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단지리 굴무덤
산비탈을 옆에서 파고 들어가 그 안에 무덤방을 만든 굴무덤(橫穴墓)이 15기 발견되었다.
이런 무덤은 이전에 공주 안영리에서 3기, 장선리에서 1기가 발굴된 바 있다.
굴무덤은 원래 북부 구주에서 5-6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입구가 넓고 깊이가 얕아 시신을 가로로 넣는 방식과 입구가 좁고 깊이가 깊어 시신을 세로로 넣는 방식이 있는데, 단지리에서는 각각 5기와 9기가 발견되었다. 일본에서는 두 방식이 병존하다 점차 뒤의 방식으로 통일된 바 있다.
단지리 굴무덤에서는 왜식 토기인 수혜기(須惠器)가 함께 출토되어 왜인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단지리의 굴무덤에 대응되는 기록은 일본서기의 다음 기록이다.

0479-04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백제의 문근왕(文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병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

축자국은 북부 구주에 있다.
왜는 백제가 고려에 패했을 때 하치리의 별읍이었던 공주를 주어 재기의 발판으로 삼도록 한 바 있다고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
점점 일본서기의 기록이 고고학적 발견과 일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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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 지역의 고고학적 양상
구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독널무덤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 유독 발달하였고 일본 전역에서 많이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이 한국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된다. 무덤방 벽을 붉게 칠한다든가 돌방 안에 돌널을 넣는 것 등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는 무덤양식까지 포함하면 왜계 무덤의 분포는 기록을 통해 추정한 임나의 영역과 비슷하게 된다.
한국 역사학계는 그만 항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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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안호리 고분의 의미
백포만에서 철기를 매개로 대외교류에 참여한 마한 해상세력이 해남 안호·석호리 대지유적에 집단 고분군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침미다례(忱彌多禮) 집단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다. 침미다례는 해남반도에 터를 잡은 마한의 주요 세력이다. 서기 369년 백제 근초고왕의 남정(南征) 과정에서 소멸했다. 안호·석호리 대지유적 고분군의 소멸 시기가 이 기록과 일치한다.

-- '서기 369년 백제 근초고왕의 남정(南征)'이란 건 역사기록에 없다.
일본서기에 신공황후가 군대를 보내 한국의 7국과 4읍을 점령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침미다례도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리고 해남은 침미다례보다 4읍의 하나로 보는 게 더 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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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의 옛 무덤
고흥에서 5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 2기가 발굴되었다.
그 중 야막리 고분은 왜식 돌방무덤인데, 독립된 구릉에 1기만 만들었다는 특징과 더불어 분구 표면에 돌을 깔아 마무리하는 이른바 즙석시설을 했다는 점에서도 강한 왜색을 드러냈다. 출토된 투구와 갑옷도 왜식이다.
이 고분은 길두리 고분의 성격을 해석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길두리 고분도 무덤 양식이 백제나 마한과 다른 데다 왜식 갑옷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흥의 옛 무덤들을 설명할 역사 기록은 일본서기에도 없다.
그래서 주변의 고고학적 양상과 비교해서 추정해 보는 수 밖에 없다.
영산강 유역은 독널무덤을 쓰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전방후원분이 축조되었다.
그렇다면 왜의 무덤 양식이 고흥에서 영산강 유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부장품과 달리 무덤 양식은 묻힌 사람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일본서기에 왜가 4세기 후반에 한국으로 진출했다고 하니 그와 연결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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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계 갑주의 분포
한국에서 출토되는 왜계 갑주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며 영남과 남해안에서 많이 출토된다. 이러한 왜계 갑주는 실용적인 용도였을 수도 있고 의식용이었을 수도 있다. 왜계 갑주는 전방후원분과 왜계 돌방무덤 그리고 한국식 무덤 모두에서 출토된다. 따라서 왜계 갑주와 함께 묻힌 사람은 왜인이었을 수도 있고 한국인이었을 수도 있다.
http://kallery.net/s.php?i=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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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1. 가야사 통설
가야의 영역이 낙동강 수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설정하였고 백제가 근초고왕때 영산강 유역까지 차지했을 것으로 가정하였다. 현재의 국사책에는 이 지도가 사용되고 있다.

2. 가라
남원과 장수에서 가라계 고분이 발견되면서 기존에 설정했던 가야의 영역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3. 김태식 가야 지도
남원과 장수에서 발견된 가라계 고분을 반영하여 가야의 영역을 설정하였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4현을 이 영역에 끼워넣은 것이 눈에 띈다.

4. 모한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면서 백제가 근초고왕때 이 지역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하기 힘들게 되었다.

5. 일본 역사교과서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을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4현으로 가정한 주장이 일본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다.

6. すえまつ의 임나흥망사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4현이 서남단으로 비정되어 있고 상주도 임나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7. すえまつ의 임나흥망사 2
금강 유역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영역이 축소되는 과정을 그렸다.

8. 솔까역사 임나 지도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4현을 금강과 만경강 유역에 비정하였다. 반파는 가라의 이칭으로 보았고 탄현에서 상주까지는 신라가 일찌감치 차지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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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도 남아있는 임나사의 흔적

삼국사기에는 우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신라고기에서 이르기를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嘉實王)이 당(唐)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니 음악이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하며 이에 성열현 사람 악사 우륵(于勒)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 상가라도(上加羅都), 셋째 보기(寶伎), 넷째 달이(達已), 다섯째 사물(思勿), 여섯째 물혜(勿慧), 일곱째 하기물(下奇物), 여덟째 사자기(師子伎), 아홉째 거열(居烈), 열째 사팔혜(沙八兮), 열한째 이사(爾赦), 열두째 상기물(上奇物)이다.

여기서 상가라와 하가라는 각각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라와 남가라고 상기물은 양직공도에 나오는 상기문이다. 상기물과 하기물은 합쳐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이다.
상기문과 하기문은 각각 섬진강 상류와 하류에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임나사 복원에 기대가 크다.
http://kallery.net/s.php?i=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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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과 도종환은 왜 충돌하는가?
"가야와 임나가 같은 곳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을 따르는 국내 학자들의 논문들이 상당히 많은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 도종환
“보통 가야사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치는 이런 역사로 생각들 많이 하는데 사실은 더 넓다. 섬진강 주변, 그 다음에 또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는 남원 일대 그리고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이 남아 있는 넓은 역사” - 문재인

가야는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말로 낙동강 중하류 지역으로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섬진강과 금강 유역은 일본서기에 임나로 나오지만 삼국사기에는 언급이 없다. 일본서기에는 낙동강 중하류도 임나로 통칭하였다.
따라서 섬진강과 금강 유역을 가야로 묶는 것은 일본서기의 모형을 따른다는 뜻이다.
임나사를 거부하는 도종환과 문재인이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8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부터 섬진강과 금강 상류 지역에서 낙동강 중하류 지역과 동일한 유물과 유적이 쏟아져 나왔다.
고고학적 양상은 임나사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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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임나사 복원을 환영한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완화하는 데 가야사가 도움이 되는 이유로 “보통 가야사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치는 이런 역사로 생각들 많이 하는데 사실은 더 넓다. 섬진강 주변, 그다음에 또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는 남원 일대 그리고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이 남아 있는 넓은 역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 정도로 아주 넓었던 역사기 때문에 가야사 연구 복원은 말하자면 영호남 공동사업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http://kallery.net/s.php?i=660

-- 비로소 역사를 아는 대통령을 만난 듯하다. 다만 미흡한 점이 있는데 가야가 아니라 임나가 정확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14) 뿐만 아니라 송서(488), 남제서(537), 양서(636), 남사(659), 일본서기(720), 봉림사진경대사비(924), 삼국사기(1145) 등 광범위한 기록에 등장한다. 이에 비해 가야(加耶)는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사용된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섬진강 유역에는 기문국이 있었고 금강 유역에는 치리국이 있었다. 금강 이남 낙동강 중하류가 모두 임나였던 것이다.
http://kallery.net/s.php?i=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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