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의 선조는 흙수저로 태어난 개룡남
어우야담(유몽인 1559-1623)에는 흙수저로 태어나 개룡남이 된 반석평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한다.

반석평은 노비의 신분으로 한양의 이 참판(?)집에서 가노(家奴, 집노비) 노릇을 했다. 본래 영리했던 그는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었던지 주인집 아들 이오성이 방에서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밖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석평의 도둑공부를 알게 된 이 참판은 그의 순민(醇敏, 순수하고 민첩함)한 성격을 좋아하여 시서(詩書)를 가르치고 자식과 함께 배우게 했다. 석평은 이 참판에게 집을 나가 공부를 더해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 참판은 그의 청을 들어주어, 노비문서를 불태워 없애고 친척 양반집에 양자로 보냈다.
https://goo.gl/aK4NpJ

이 이야기에 의하면 반석평의 부계 혈통은 반씨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17세기의 족보 ‘씨족원류’와 19세기의 ‘만가보’에 의하면 석평은 충북 음성군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반석평의 산소가 존재하고 있다. 석평은 13세에 아버지 반서린을 잃는다. 그러자 어머니 회미 장씨는 반석평 등 3형제를 데리고 한양으로 가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삯바느질 등 온갖 고생을 한 것으로 문중사는 전하고 있다.
https://goo.gl/aK4NpJ

반석평의 부계 혈통이 반씨라는 이야기다.
만가보에는 반사덕(潘思德)-반강(潘岡)-반서린(潘瑞麟)-반석평(潘碩平)까지만 계통이 나와 있다.
https://goo.gl/XJDg9o
나머지는 씨족원류와 문중사의 이야기일 것이다.
중종실록의 1514년 기록에도 반석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기록이 어우야담이나 문중사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다.

"홍문관은 그 인물을 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문지(門地, 문벌)도 보아야 합니다. 반석평(潘碩枰)은 문지가 미천하기 때문에 이미 서경(書經, 사헌부와 사간원의 검증)하지 않았습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옛날에는 혹 도구(屠狗, 개 잡는 사람)와 관고(管庫, 창고 지키는 사람)의 무리에서 사람을 천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예전의 사람 쓰는 법은 세류(世類, 가문 또는 신분)이고 아닌 것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문벌에 구애되어 어찌 등용의 길이 넓지 않음을 보이는가! 석평은 천얼(賤孼, 천한 첩에서 난 자식) 출신으로 시골에 살았는데, 그가 학문에 뜻이 있음을 그의 조모가 알고서, 천얼임을 엄폐하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그 손자를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취학시켰다.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여 중외(中外)의 관직을 거쳐 지위가 육경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그 조모를 현명하게 여겼다.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902003_004

당시에는 양인과 노비 사이에 난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노비였지만 손자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 할머니가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공부를 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조실록(1777)
"대저 문벌을 숭상하는 풍습은 조위(曹魏)의 시대에 시작된 것인데, 천년(千年)토록 이를 답습하여 오면서 아직도 고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세가(世家, 세력이 있는 가문)에게는 이로운 것이지만 국가의 복은 아닌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사람을 기용함에 있어서는 신분의 소원함을 개의치 않았으므로 반석평(潘碩枰)·유극량 같은 이는 신분이 천적(賤籍, 노비 호적)에 들어 있었지만 결국은 명신(名臣)과 양장(良將)이 되었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1029_003

반기문은 반석평의 후손이고 반석평은 광주 반씨의 시조 반충의 후손이다.
반충은 거제 반씨의 시조 반부의 후손이고 반부는 송나라 사람인데 몽골을 거쳐 왕씨고려로 와 거제 반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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