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숭배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고려가 기자를 숭배하였다는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나온다.

0945 구당서(舊唐書)
(고려의) 풍속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아 영성신, 일신, 가한신 그리고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

1060 신당서(新唐書)
(고려의) 풍속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많아 영성 및 해, 기자(箕子) 그리고 가한 등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혼인할 적에는 폐백을 쓰지 않으며, 받는 자가 있으면 수치로 여긴다.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는 사건은 BC 1046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자를 숭배했다는 고려의 풍속은 구당서와 신당서 이전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풍속이 고려 후기에 생겨난 것은 아닐까?
풍속은 변하는 것이고 고려의 혼인 풍속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0289 삼국지(三國志)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뒷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절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세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작은 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0636 수서(隋書)
시집 장가드는 데도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혼례를 치른다. 남자의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다. 만약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수치로 여긴다.

고려는 부여 계통을 표방하였고 건국 설화도 부여의 동명 설화를 모방한 주몽 설화다.
주몽 설화는 중원의 기자가 조선으로 와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는 기자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국조가 두 사람 존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을 거쳐 낙랑이 되었다.
그 낙랑을 고려가 313년에 병합하고 427년부터 도읍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부터 낙랑의 기자 숭배가 고려의 풍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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